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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avioral-economics story

승자라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누군가를 패배자라고 부르지도 말자[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코넬 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Harris Frank)는 '능력주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인물이다. “실력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지금의 불평등은 실력의 결과이므로 인정해야 한다”라는 보수적 사고로 이어진다.

하지만 프랭크 교수는 본인이 코넬 대학교에서 종신 교수직을 따낸 일조차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각종 행운이 겹쳐져서 벌어진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결코 실력이 아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en.wikipedia.org

그런 그가 2009년 『뉴욕타임스』에 ‘축배를 들기 전에 당신의 행운에 먼저 감사하라

(Before Tea, Thank Your Lucky Stars)’라는 칼럼을 실었다.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경제학자의

소신이었을 뿐인데 이 칼럼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스스로를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나쁜 쪽으로) 폭발적이었다.

 

“내 성공이 행운 덕분이었다고? 웃기는 소리 작작 해. 그건 내 재능과 노력의 산물이야!”

논란의 중심이 된 프랭크 교수는 쇼 진행자 스튜어트 바니(Stuart Varney)의 초청을 받아

『폭스 비즈니스 뉴스쇼』에 출연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폭스그룹은 미국 방송사 중 가장

보수적인 곳이다. 우리로 치면 『TV조선』쯤 되는 스탠스인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애지중지하는 방송으로 유명하다. 진행자인 바니도 미국을 대표하는 보수 논객이었다.

 

방송에서 진행자 바니가 게거품을 물었다. 바니는 “내가 당신 칼럼을 읽고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는지 아느냐? 35년 전 빈손으로 미국에 이민 온 나는 오로지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 영국 악센트를 쓰면서 미국 방송사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이 알아? 당신이 뭔데 내 성공을 행운 덕이라고 폄하하냐고!”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얼핏 들으면 바니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무일푼 이민자로서 바니가 미국에서

거둔 성공을 “오로지 행운 덕분”이라고 말하면 바니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하나 있다. 바니는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 영국의 명문 런던정경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런던정경대학은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다. 즉 그는 빈손으로 미국에 이민 오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먹어주는’ 학벌을 손에 쥐고 미국에 온 것이다.

 

그는 “영국 악센트를 쓰면서 미국 방송사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프랭크 교수는 자신의 책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영국식 억양이 핸디캡이라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시길! 미국인은 영국식 악센트를 동경한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요인

 

무엇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을 꼽는다. 그런데 이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운’이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 외에도 매우 중요한(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요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 교수는

8학년(우리로 치면 중2) 학생들의 수학 성적과 대학 졸업장 획득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8학년 때 수학 성적이 상위 25%에 들어도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쥘 확률이 29%에 불과했다.

 

반면 수학 성적이 하위 25%에 머물렀던 부유층 집안 자제들이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쥘 확률은

30%였다. 어렸을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수학 성적을 잘 받아도 대학 졸업장을 거머쥘 확률은 공부

더럽게 안 한 부잣집 아이들보다 낮다는 이야기다.

 

대학 졸업 이후 삶은 더 크게 벌어진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청춘을 바친다. 반면 부잣집 아이들은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저축도 하고 집도 산다.

 

이들 중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할까? 물어보나 마나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결과를 두고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이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나? 수학 성적이 하위

25%여도 부모를 잘 만난 운을 타고 나면 성공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법이다.

 

우리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자꾸 성공한 사람들을 모은 뒤 “저 사람들이 왜 성공했느냐?”를

너무 열심히 분석하고 있다. 이러면 당연히 그들 중 누구는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고, 누구는 성실한

노력을 포장한다. ‘노력과 재능’은 성공의 만능키가 된다.

 

그런데 그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을 다 가진 사람 중 실패한 사람들이 없을 것 같은가?

당연히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고 무지하게 많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같은 노력과 재능으로

성공하지 못했는지를 분석하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닌가?

 

프랭크 교수가 10만 명을 대상으로 모의실험을 벌인 결과 비슷한 재능과 비슷한 노력을 퍼부은

사람들 중 승자는 단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 운 좋은 사람이 정상에 올라서서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외면을 당한 수많은 ‘또 다른 우리들’의 불운에 대해 더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패배자라고 부르지 말라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도 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작용했다. 내 경력 중

‘메이저 언론 출신’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나는 ‘메이저 언론 출신’임을 전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메이저 언론사의 이념의 후져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그 메이저

언론에 합격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기 때문이다.

 

겸손해 보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메이저 언론사에 합격하기 전에 이미 세 곳의

마이너 언론사 입사 시험을 쳤다. 붙으면 무조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 떨어졌다.

나는 마이너 언론 시험에서 줄줄이 낙방하는 행운에다가, 메이저 언론사의 논술주제가 하필

내가 바로 전날 준비한 주제였다는 놀라운 행운이 겹쳐 그곳에 입사했다.

 

그래서 승자들은 겸손해야 한다. 제발 당신의 승리가 오로지 당신 덕이라고 말하지 말라.

부동산 과세에 대해 “집 가진 게 죄냐?”고 외치지도 말라. 집 가진 건 당연히 죄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쩌다보니 그 집을 가졌고, 그 집값이 수억 원이 올랐다. 그건 결코 당신의

노력과 재능 덕이 아니다. 그 운에 감사하며 그 성공의 과실을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희들은 몰라!”라고 말하지도 말라. 똑같은

노력을 하고도 정규직이 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은 게 아니다. 그냥 조금 불운했을

뿐이다. 심지어 똑같은 노력을 할 상황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수두룩하다.

 

마트 노동자들의 투쟁기를 그린 만화 『송곳』에서 “노동운동을 통해 비정규직의 삶을 개선하자”고

주장하는 노동운동가에게 한 노동자가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쩌라고요. 본인이 책임져야죠!”라며

비웃듯 말한다. 이때 노동운동가 구고신은 이렇게 답을 한다.

“패배는 죄가 아니오. 게다가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평범한 거요. 우리의 국가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오.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렇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패배자라 불릴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조금 평범했을

뿐이고, 조금 불운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승자라고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 제발 이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단언하는데,

평범함과 불운함이 죽을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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